김용희(金容希, 1860~1927)가 처소로 지은 만취정에서 후석 오준선은 위험한 가지에서 학몽을 꾸는 처사를 걱정하는 시를 읊는다. 이는 자신이 면암 최익현의 항일의진에 직접 몸으로 차여하지 못한 죄책감이 베어있다.亭前種得澗松遲 뜰앞에 솔을 심어 그 빛이 더디(지지遲遲 )니爲愛貞姿善護待 그 모습 사랑하여 정성
후석 오준선의 <후석유고>『후석유고』는 한말의 유학자인 오준선의 목활자본 시문집으로, 25권 12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권1, 2는 오준선의 詩와 賦 451수가 수록되어 있다. 사우들과의 차운시 및 輓詩를 비롯해서 述懷 및 景物詩 등 다양한 내용의 시를 시기별로 편집하였다. 스승인 奇正鎭을 비롯해서 宋近洙,
농은 이근태의 농은정에 대한 후석 오준선의 기문이다. 이 때의 농은정은 한자가農隱亭, 膿隱亭 등 출처마다 다르므로 원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호가 膿隱이므로 膿隱亭이 마땅해보인다.農隱亭記世之隱者或入山而逃名或避地而浮海或屠市酒肆托跡而藏身之數子者非高尙其事以保淸節猖狂自恣以避禍網而然於中行之道胥失
<난와유고難窩遺稿> 난와 오계수(1843∼1915)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6년에 간행된 시문집이다.유학자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며 항일지사인 오계수는 본관은 나주.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아버지는 갑선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 정시혁鄭時爀의 딸이다. 17권 8책. 목활자본. 1916년 오준선(吳駿善)·
송용만(宋用萬, 1888~1962)은 광산군 본량면 매동리에사 살았고, 자는 현중(賢仲), 호는 매산(梅山)이다.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경(坰)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 익상(翊尙)의 딸이다.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 1843∼1915)와 후석 오준선吳駿善(1851~1931)의 문인이다. 송용만은 용진정사(聳珍精舍)에서 수학하
유인석(柳寅奭)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아버지는 유하영(柳河永, 號 農山), 어머니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재묵(在黙)의 딸이다. 1859년(철종 10) 5월 9일 태어나 광산구 삼도면에서 살다가 193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이희용의 문집 《쌍석유고(雙石遺稿)》(1984)는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권1에는 20首의 詩와 松沙 奇宇萬, 勉菴 崔益鉉, 植齋 奇宰, 弦窩 高光善 등에게 보낸 70여 편의 편지글이 실려 있다. 권2에는 雜著, 序, 記, 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이희용의 「雙石亭原韻」에 차운했던 20여 인의 서문과 작품이 차례대
광산구 삼도동 도림마을 지어재(志於齋)는 조선 영조때 광산에 살던 동강처사 오대하吳大夏(1677∼1743)가 강학터로 지어 지냈던 곳이다. 지어(志於)는 논어 술이(述而)편에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의 세계에서 노닐어야 한다.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는 공자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나
쌍석정(雙石亭),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이 지어
금서(琴書)와 자연을 벗 삼아 여유롭게 살아가며 시주를 즐겼던 곳이다. 정자는 사라지고 없다. 산곡(山谷) 최기모(崔基模, 1869∼1925) 등이 이곳에 오르고 시(謹次雙石亭韻 李熙容)를 남겨 이곳도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869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의 자는 익삼(益三),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하동(河東) 정씨다. 아버지는 정지초(鄭志楚),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 사이에 광주광역시 오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날마다 책을 읽었으며,
광산구 비아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회산晦山 강세영(姜世永)이 지어 지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그의 친구 범원식范瑗植이 부탁해 후석 오준선(1851~1931)이 기문을 써주었다. 정자 주인 강세영의 시에 ‘비아飛鵝 학림鶴林 두 지역이 서북으로 둘러 앉고’라는 글귀로
북구 효령동 (학동마을)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구 효령동, 학동 남쪽에는 황새형국의 황새봉을 향해 깊게 패여 있는 골짜기 점불이 있고 학동 동북쪽에는 쑥대봉이, 동남쪽에는 감나무가 많은 감남골이 있다. 학동마을 뒷산 높은 언덕 위에 초은(樵隱) 이호헌(李顥獻)(1858~1919)이 정자의
북구 생룡동 (생룡마을) 광주패밀리랜드 건너 생룡마을 뒷산인 죽취산 기슭에 금성범씨 모정 범형식范瀅植(1872~ ?)의 죽취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죽취정은 그의 선묘가 있는 근처에 1895년 추모의 정자 성격을 띠었다. 그의 아들 범희채范熙埰가 중수하였다.주인 범형식은
북구 수곡동 산45-1 북구 수곡동에 정각정이 있다. ‘정각正覺 = 정등각正等覺 - 참(정말) + 깨닫다’는 불가의 용어로 바른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정자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거실 1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판자마루로 꾸며져 있다. 효령동의 초은정樵隱亭을 수곡마을로 옮겨 정각정
광주시 광산구 평동(관동)에 돈학재敦學齋의 주인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1869~1932)의 강학지소였다. 송사 기우만이 기문을 남겼고 여러 문인이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이중권의 자는 경구(敬球)요, 호는 묵헌(黙軒) 또는 돈학재(敦學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다. 1869년 광주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한 복룡재(伏龍齋